I. 서론
1. 개요
현리전투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5월 16일부터 5월 22일까지 강원도 인제 현리지구 근방에서 대한민국 국군 제3군단과 중국 인민해방군 9병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한국전쟁은 개전부터 휴전에 이르기까지 시소 전쟁이라 할 만큼 치열한 전쟁, 그 자체였다. 인천상륙작전, 백
4. 전투 결과
현리전투는 중동부전선이 무너진 국군의 치욕적인 전투임
특히 패배의 원인인 국군 3군단을 즉시 해체되고 3사단은 국군 1군단, 9사단은 미 10군단에 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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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국군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육본을 거쳐 지휘하던 관행을 깨고 미군이 한국군을 직접 지휘
동해안 지역에서
운이 걸려있는 수도를 사수하라고 명령한다. 각 사단은 수도 사수의 최종점인 의정부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선전한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수호신으로 불리던 T-34전차 앞에 의정부를 담당하던 7사단은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 장에서는 한국 전쟁사중 의정부 전투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전투의 경과
북한군 3사단의 8,9월 총공세에 맞서 다부동을 지키기 위해 국군 제1사단은 지형의 이점을 활용해 다부동 일대에 설정된 주저항선에서 대구를 공략하려는 북한군 3개 사단을 상대로 낙동강 방어 작전 중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다부동 일원에서는 대구를 놓고 피아(彼我) 간에 유학산전
전투 결과
국군의 승리
다부동 전투는 북한군의 8,9월 총공세로 55일동안 지속되었으나 결국 국군이 승리
전과
국군은 1만여명의 희생자를 냈지만 북한군의 3개사단 2만4천여명을 사살함
전쟁에 미친영향
다부동 전투는 수많은 전투중의 하나였으나 국군에게 있어 값있고 중요한 승리
전투를 조사하면서 이 전투를 통해 국토의 마지막 보루였던 최후의 방어선을 어떻게 지켰으며 어떻게 싸웠는가의 실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우선 영천전투의 기본적인 개념과 낙동강 방어선작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영천의 지리적 이점과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파악하고 영천전투의 전투 상황을
전투를 치뤄 중공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10월 7일 중공군은 다시 제4차 공세를 감행해 395 고지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에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가 투입되어 2시간의 걸친 전투 끝에 395고지를 탈환했다.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제5차 공세를 가해 오전 8시 다시 395고지 정상을 점령
전투가 3일 동안이나 계속됐다. 이로써 8사단은 비로소 영천 동북방에서 돌파 저지선을 형성하고 예비부대를 확보 할 수 있게 됐다. 이때 적은 북동에서 큰 돌파구를 형성하고 국군 전선을 절단하려는 기세로 임포동으로 전진 중이었다. 적 103연대와 73연대는 돌파구의 견부를 확대하기 위해 21연대를 공
11월 30일~12월1일
제5해병연대 유담리 방어 담당
제7해병연대 하갈우리까지의 도로개통
7연대,5연대 하갈우리로의 철수 위한 재배치
제5해병연대 3대대를 전위부대로해서 제5,7해병연대를 유담리-하갈우리 간의 도로경유하여 철수 시작
12월5~10일
미국1해병사단 하갈우리에서 고토리로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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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의 지리적 이점
: 대구에서 34Km, 경주에서 28Km 거리에 위치하는 교통의 요지
작전 지역의 북쪽은 험준한 산악지형, 남쪽으로는 전차부대 운용에 유리한 지역
중앙선과 대구선 철도가 연결되는 도로와 철도교통의 중심이 되는 요충지이며
낙동강 방어선 전체로 볼 때 국군이 담당하고 있는